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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범죄자 결탁한 ‘검범유착’ 프레임”

'묵묵부답' 김봉현 회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묵묵부답’ 김봉현 회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전명훈 기자 = 라임자산운용 사건의 주범인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이 야권 로비를 폭로한 ‘옥중서신’과 관련, 국민의힘은 17일 “의도가 석연치 않다”며 특검 도입을 재차 주장했다.파워볼

윤희석 대변인은 논평에서 “청와대 정무수석 로비를 폭로한 김 전 회장이 돌연 ‘윤석열 사단’, ‘검찰 개혁’을 운운했다”며 “난데없이 야당을 끌고 들어가는 까닭이 무엇인지 혼란스럽다”고 밝혔다.

윤 대변인은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서신에 언급된 검사들에 대한 감찰을 지시한 것과 관련, “내 편 의혹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더니 옥중서신 한 통에 뭔가 나왔다는 듯 공격 태세가 사납다. 여권 인사들이 의혹에 줄줄이 엮일 때는 왜 가만히 계셨는가”라고 말했다.

윤 대변인은 “내용의 진실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옥중서신이 공개된 만큼 이제 검찰의 수사를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게 됐다”며 “독립적인 특검에 수사를 맡기는 것이 가장 현명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경태 의원도 페이스북에서 “권력형 비리인지 아닌지를 가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특검을 해야 한다”며 “여당이든 야당이든 특검을 거부하는 정당은 국민의 손으로 심판하고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봉현 전 회장의 옥중서신 공개가 ‘검언(檢言)유착’ 사건의 얼개와 비슷한 ‘검범(檢犯)유착’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서울 송파병 당협위원장인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페이스북에서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라며 “한동훈 검사장과 채널에이 기자가 짜고 이철 밸류인베스트코리아(VIK) 대표에게 유시민을 잡을 단서를 달라고 공작했다는 ‘검언유착’과 닮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검찰이 범죄자와 결탁하는 ‘검범유착’ 프레임이 그려진다고 덧붙였다.

id@yna.co.kr

[뉴스 분석] ‘친일파 발언’ 관련 기사 74%에 ‘진중권’ 등장.. <반일 종족주의> 비판은 묻혀

[김시연 기자]

▲  조정래 작가가 12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등단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을 듣고 있다. 2020.10.12
ⓒ 연합뉴스

“(앞부분 생략)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가 돼 버립니다. 민족 반역자가 됩니다. 그들을 일본의 죄악에 대해서 편들고, 왜곡하는, 역사를 왜곡하는 그자들을 징벌하는 새로운 법을 만드는 운동이 지금 전개되고 있습니다. 제가 적극 나서려고 합니다. 아리랑을 쓴 작가로서 이것은 사회적, 역사적 책무라고 생각합니다.”(조정래 작가 기자회견 발언 녹취록 가운데)”동행복권파워볼

조정래 작가는 지난 12일 오전 등단 50주년 기자간담회에서 많은 발언을 했지만, 일부 언론은 그를 ‘일본 유학 갔다 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가 된다’라는 극단적인 발언을 한 인물로 각인시켰다.

조 작가가 지난 14일 방송 인터뷰에서 당시 자신의 발언은 모든 일본 유학자를 지칭한 게 아니며,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라고 범위를 제한했음에도 일부 언론에서 주어부를 없애 자신의 발언을 왜곡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를 정정보도한 언론사는 없었다.

“대통령 딸도 일본 유학했는데”… 진중권 발언이 논란 더 키워 

일부 언론의 ‘거두절미’ 보도가 발단이 됐지만 ‘조정래 발언’ 논란이 커진 데는 이른바 ‘진중권 저널리즘’도 한몫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지난 12일 오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정도면 ‘광기’라고 해야죠. 시대착오적인 민족주의 안에 잠재되어 있는 극우적 경향이 주책없이 발현된 것이라고 봅니다”라고 조 작가를 비판했다.

이어 그는 같은 날 “대통령의 따님도 일본 고쿠시칸 대학에서 유학한 것으로 아는데… 일본 유학 하면 친일파라니 곧 조정래 선생이 설치하라는 반민특위에 회부되어 민족반역자로 처단 당하시겠네요”라며, 대통령 가족까지 거론해 친여 누리꾼들까지 자극했다.

평소 진 전 교수 SNS 발언을 현 정권 비판에 적극 활용해온 보수 언론들이 먼저 먹잇감을 물었다.

‘조중동’은 이날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조정래 “日유학 갔으면 친일파” 진중권 “文대통령 딸도 친일파냐”>(조선일보), <조정래 “日 유학 다녀오면 친일파” 진중권 “이정도면 광기”>(중앙일보), <조정래 “日유학, 무조건 친일파” 주장에…진중권 “이 정도면 광기”>(동아일보) 등 두 사람 발언을 묶어 보도했다.

여당과 조 작가도 이같은 ‘진중권 저널리즘’을 비판했다. 박진영 더불어민주당 부대변인은 지난 13일 공식 논평에서 “진중권씨의 조롱이 도를 넘어서 이제는 광기에 이른 듯하다”면서 그를 <삼국지>에서 조조, 유표, 황조 등을 조롱하다 죽은 ‘예형’에 비유해 논란을 키웠다.

조 작가도 지난 14일 KBS1 라디오 <주진우 라이브>에 출연해 자신을 향해 광기라고 말하고 대통령 딸까지 끌어들이는 등 무례와 불경을 저질렀다면서 진 전 교수가 사과하지 않으면 명예훼손으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조정래 발언 관련 기사 127건 중 94건에 ‘진중권’ 등장

언론은 조정래 작가와 진중권 전 교수 발언을 어떻게 활용했을까? 한국언론진흥재단 뉴스 빅데이터 시스템 ‘빅카인즈’을 활용해 지난 12일부터 16일 사이 54개 매체 기사를 분석했더니, 조정래 작가 친일파 발언 관련 보도 126건 가운데 ‘진중권’ 발언이 같은 언급된 기사가 94건(약 74%)이었다.(아래에 기사분석보고서 첨부)

11개 중앙일간지 가운데 <세계일보>는 12건(100%) 모두 두 사람 발언을 묶어 보도했고, <조선>은 11건 가운데 8건(73%), <중앙>은 7건 가운데 6건(86%), <동아>는 4건 가운데 3건(75%)이었다. 반면 <경향>은 2건 가운데 1건(50%)에 그쳤고, <한겨레>는 조 작가 발언 기사만 1건이었다.조 작가 발언 기사 연관 키워드 분석에서도 ‘진중권’ 키워드 빈도수가 265회로 가장 많았다. 결국 진 전 교수 발언이 조정래 작가 발언 논란 확산에 가장 많이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   조정래 작가 ‘친일파 발언’ 관련 기사 연관 키워드 분석 결과 ‘진중권’ 키워드가 빈도수 265으로 가장 많았다.(자료 : 한국언론진흥재단 ‘빅카인즈’ 분석 결과)
ⓒ 언론재단 빅카인즈

조 작가 해명에도, 진 전 교수는 지난 15일 “문인이라면 문장을 제대로 써야죠”라며 “그 낱말들(“무조건 다”)이 들어간 이상 문장은 당연히 일본 유학생은 무조건 다 친일파라는 식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근데 그 잘못을 왜 애먼 언론에 뒤집어 씌우는지”라며 언론을 두둔했다.실시간파워볼

조 작가 발언은 자신의 소설 <아리랑>을 비판했던 <반일 종족주의> 저자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을 겨냥했지만, 대부분 언론은 조 작가 발언을 액면 그대로 전달하면서 진의를 둘러싼 논란만 키웠다.(관련기사 : “이영훈이 저를 많이 욕했는데…” 조정래의 일침  http://omn.kr/1pmac )<한겨레> 문학전문기자인 최재봉 선임기자는 지난 12일 현장 취재 기사에 조 작가 발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실었다. 과연 조 작가 발언 취지를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한 건 어느 쪽이었을까?

“토착왜구라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일본의 죄악을 편들고 역사를 왜곡하는 민족 반역자들에 맞서는 운동에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려 합니다. 그것이 <아리랑>을 쓴 작가로서 책무라고 생각해요.”(<한겨레> “민족 반역자들에 맞서는 운동은 ‘아리랑’ 작가로서 책무죠”)

[어느 도시인의 고향 탐구] 수유리⑦ 미감아 다니던 한신초등학교, 차별과 배제의 역사

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살던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 <편집자말>

[강대호(작가)]

나는 1973년 수유동에 있는 한신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한국신학대학교, 지금은 수원으로 옮긴 한신대학교가 세운 사립 초등학교다.

입학식 날, 강당으로 들어서자 대여섯 명 아이들이 한데 모여있었다. 나랑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아이들은 좀 달라 보였다. 짧은 머리의 남자아이들과 똑단발의 여자아이들. 여느 입학생들보다 피부가 까맣고 거칠던 그 아이들은 눈에 확 띄었다.

그중 몇몇과 한 반이 됐고 그 아이 중 하나와 난 짝이 되었다. 왠지 기죽어 보이던 그 아이는 집이 굉장히 멀었다. 내 짝은 아침 일찍 동네 친구들, 그리고 언니 오빠들과 스쿨버스를 탄다고 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고, 서울 시내를 거치고도 한참을 와야 학교에 도착한다고 했다.

내 짝과 그 동네 아이들은 어떤 이유로 집 근처 학교가 아닌 멀리 있는 학교에 다니게 됐을까. 그것도 사립학교에. 거기엔 차별과 배제의 역사가 숨어 있었다.내곡동 ‘에틴저 마을’에서 온 친구

▲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인마을 이 곳은 예전에 한센인들의 정착촌인 ‘에틴저 마을’이 있었다.
ⓒ 강대호

혹시 ‘미감아(未感兒)’라는 단어를 들어 보았는가? 사전적 의미로는 “병따위에 아직 감염되지 아니한 아이”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센병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한센병에 걸리지 않은 아이를 한때 미감아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는 예전에 한센병을 치유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 전국에 있었다. ‘음성 나환자촌’이라고도 불렀는데,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헌인마을도 그중 한 곳이었다. 한 마을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았으니 아이들은 계속 태어나고, 그 아이들이 학령기가 되면 학교에 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지역사회는 한센인과 그 가족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1969년 서울 성동구 내곡동(당시엔 지금의 강남 3구가 성동구였다)에 있던 음성 나환자 정착촌 ‘에틴저 마을’의 학령기 아동 5명이 인근 ‘대왕국민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문제가 생겼다. 에틴저는 그 마을에 도움을 준 외국인 선교사의 이름이다.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 발행한 ‘미감아증명서’, 즉 ‘이 아동은 한센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다는 증명서’를 첨부해 입학을 허가한다고 했으나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났다. <조선일보> 1969년 4월 26일자에 실린 ‘또 미감아(未感児) 울리는 분별없는 등교 거부’ 기사는 대왕국민학교 전교생이 등교 거부하고 있다고 전한다.

기사 제목의 ‘또’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한센병 자녀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그 이전부터 계속 있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한센인 자녀 중 감염되지 않은 아이들을 ‘미감아 보육원’에 수용하기도 했다.한센인 시인 ‘한하운’은 <경향신문> 1962년 3월 17일자에 기고한 ‘나병은 상품이 아니다’ 칼럼에서 한센인 차별 정책을 비판하며, 특히 한센인 자녀 교육 문제 해결을 촉구한다.

특히 등교 문제에 있어서 아직도 반대를 받고 있는데 시급히 등교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거절된 교육에서 군에 입대한 모순을 시정 하여야 한다.

한하운은 한센인 자녀들에게 학교는 가지 못하게 하면서 군대는 가라고 하는 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이렇듯 한센인 자녀들이 학령기가 되어 인근 학교에 입학하려고 하면 항상 지역사회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다.

1969년에도 서울의 대왕국민학교뿐 아니라 경기도 용인에서도 등교 거부하는 학교가 있었다. 문제가 점점 커지자 당시 문교부 장관이 자기 딸을 대왕국민학교로 전학 보내고 각계각층이 나서 계몽 활동을 벌여도 학부모들을 설득하기는 힘들었다. 대신 새로운 학교의 설립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마침 미감아와 일반 아동을 통합 교육하겠다고 나서는 데가 있었다. 바로 한국신학대학교였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1969년 6월 22일 한국신학대학 병설 한신국민학교가 개교했다. 1969년에는 미감아 아동들만 교육했으나 1970년부터는 일반 아동들도 모집했다. 1973년에 나와 함께 입학한 내 짝도 한강 건너 멀리에 있던 내곡동 에틴저마을에서 온 미감아였다.

여전히 ‘관리’ 당하는 한센인

당시 일들을 좀더 알아보기 위해 한신초등학교를 방문했다. 강북구 수유동에 있던 학교는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긴 지 오래였다. 40년 가까이 근무한 강종국 교장은 그 아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1991년 마지막 한 아이가 졸업한 뒤로 미감아 합동 교육은 종료됐습니다. 비록 한 명이었지만 학교에서 큰 관심을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강 교장은 학교 자료를 여럿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초창기 학교 설립에 관한 내용과 미감아 교육에 대한 자료도 있었다. 그 중 20년 넘게 내곡동 ‘에틴저 마을’의 아이들을 통학시킨 스쿨버스 기사가 마지막 한 명 남은 아이를 자신의 승용차로 통학시켰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 헌인마을, 한센인 정착촌의 옛 흔적 예전에는 축사였을 곳에 가구 공장들이 들어섰다. 교회 탑 너머 멀리 롯데타워가 신기루처럼 보인다.
ⓒ 강대호

한센병 정책을 연구한 사회학자 김재형의 논문 ‘한센병 치료제의 발전과 한센인 강제격리정책의 변화’에 의하면, 한센인을 격리하며 차별한 역사는 오래됐다. 한센인을 관리하던 ‘전염병 예방법’이 1963년 개정돼 ‘강제 격리’ 조항은 폐지됐지만 완치된 “음성환자 중에서도 돌아갈 곳”이 있거나 “정부에서 마련한 정착촌”에 거주할 사람들만 퇴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정착촌 중 지금의 서초구 내곡동에 내 짝과 친구들이 살던 ‘에틴저 마을’이 있었다. 부산대학교 김려실 교수는 논문 ‘1970년대 생명정치와 한센병 관리정책’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한센인들을 자신들이 세운 정치적 준거에 따라 관리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강제 수용소에서 격리”했다면 이제는 “특수지역으로 분류된 농장으로 이주”시켜 “농업이나 축산업”에 종사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1980년대 초반 한센인 축산단지가 국가 축산업의 상당 부분을 점유했다”고도 밝힌다. 하지만 경제적 성공이 한센인에게 ‘정치적 시민권’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격리된 시설에서는 벗어났지만 한센인들은 정착촌에서도 관리 대상이 됐다. 현재도 한센인들은 집에서 통원 치료를 한다 하더라도 질병관리청의 ‘한센인 관리지침’에 의해 관리받는 대상이다.

차별과 배제의 아픔에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나라에는 2019년 말 현재 9288명의 환자가 있다. 그중 약 61.7%인 5728명이 집에서, 30%인 2783명이 한센인 정착 마을에서, 8.3%인 777명이 보호시설에 살고 있다. 정착 마을은 2020년 현재 전국에 82개가 있으며 보호시설은 전국에 5개소가 있다.한센병은 BCG만 제때 접종해도 99.9% 예방할 수 있고, 발병한다 하더라도 치료제 ‘리팜피신’ 600mg을 단 한 번 복용하면 3일 이내에 99.9% 전염력이 소실된다고 ‘국립소록도병원’ 관계자는 밝힌다.

▲ 재개발의 꿈 서초구 내곡동 헌인마을은 재개발의 꿈을 꾸고 있다.
ⓒ 강대호
▲ 헌인교회 한적한 헌인마을을 오래된 교회가 지키고 있었다.
ⓒ 강대호

지난주에 다녀온 서울특별시 내곡동 헌인마을, 옛 에틴저 마을은 지금은 쇠락한 가구단지로 보였다. 이곳뿐 아니라 전국의 한센인 정착촌은 가구단지로 변한 곳이 많다. 도시 인근 축산업에 규제가 많아지자 축사를 영세한 가구 공장에 임대한 것이다. 헌인마을은 현재 재개발의 꿈을 꾸는 사무실과 예전엔 축사였을 가구 공장들이 한데 모여 있다.

그리고 오래전 내 친구들과 가족들이 다녔을 교회가 동네를 지키고 있었다. 교회 목사는 에틴저 마을에 살던 사람들 대부분이 다른 곳으로 떠났지만 아직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도 여럿 있다고 전해주었다. 차별과 배제의 아픔을 겪었던 한센인과 그 가족들은 어디에선가 열심히 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에틴저 마을 이야기를 알고 계신 분께서는 제 이메일로 연락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계속 취재할 예정입니다. 이 기사는 강대호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경산 코발트광산 사건을 세상에 알린 강창덕의 이야기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  강창덕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94세)
ⓒ 박만순

“행님, 조심해서 올라가이소.” “그려, 동생도 조심하게.” 대구광역시 중구 중앙시장에 있는 2층 사무실은 계단이 가파랐다. 맨 앞에서 가는 이는 94세, 뒤따라가는 이는 88세 노인이었다. 선두의 강창덕은 아픈 무릎을 부여잡으며 잘도 올라간다.

2층에 올라서니 웬 사진이 7개나 걸려있다. 모두 익숙한 인물로 전봉준, 허위, 김구, 김창숙, 여운형, 조봉암, 전태일이었다. “선생님, 이게 웬 사진이에요?” “예, 제가 모시고 있는 7인 애국열사 영정이요. 잠시 묵념합시다.” 강창덕의 제안에 김하종 경주유족회장과 필자는 묵념을 했다. “제가 매년 조촐하게 합동위령제를 지냅니다.” 작년에 10회째 위령제를 지냈다고 한다.

“7인의 애국열사를 선정한 기준이 뭐예요?” “제가 존경하는 분들인데, 농민(전봉준), 의병장(허위), 독립운동가(김구·김창숙), 좌·우 합작 정치인(여운형), 평화통일운동가(조봉암), 노동자(전태일)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소회의실에는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다.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을 알리다

▲  1960년 6월 7일 대구매일신문 보도내용.
ⓒ 심규상

“강 기자, 코발트광산 취재해 보게”라는 편집국장의 권유도 있었지만, 그렇잖아도 강창덕은 ‘해골 광산’으로 불리는 경산 코발트광산을 취재해 볼 생각이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의 물결이 휘몰아칠 때, 피학살자 유족들도 일어났다. 경남 거창 유족들이 제일 먼저 일어났고,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도, 제주도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대구매일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강창덕은 1960년 5월 21일 카메라를 챙겨 경산 코발트광산에 갔다. 주민들에게 10년 전 그 일을 물었지만 주민들은 미리 짠 듯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자신의 뒤를 어슬렁거리던 마을 청년과 눈이 마주쳤고, 역사의 진실을 캘 수 있었다. 

사실인 즉, 일제강점기에 ‘돈방석’이라 불리던 코발트광산에서 한국전쟁 전후 대구형무소 재소자와 경산·청도지역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었고 광산 주변에는 두개골과 다리뼈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돈방석’이 ‘해골광산’이 된 연유다.

강창덕은 이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다음 날인 5월 22일자 대구매일신문은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기사를 내보냈다. 또 자부담으로 전단지 2만장을 제작, 11개 읍면에 배포했다. 방송 시설을 갖춘 지프차를 임대해 “가족 중에 6.25때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은 없습니까?”라며 마을 곳곳을 다녔다.

11개 읍면에는 “신고서를 받아 놔주시오”라며 연락사무소를 설치했다. 그는 유족회 결성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강창덕은 피학살자 유족이 아니었기에 김종석을 회장으로 하는 ‘경산유족회’를 결성하고 본인은 고문을 맡았다. 그는 유족도 아니면서 왜 코발트광산 사건 진실규명을 위해 애썼을까?

유치장에 갇힌 15세 소년

“1937년에 김일성부대가 보천보를 습격했다데”라는 강창덕의 말에 그의 친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데 소년 강창덕은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 했다. “칙쇼(이런 젠장)! 불령선인같으니라구.” 지하 유치장에서 주재소장은 강창덕에게 호통을 쳤다. 그는 경북 경산군 하양주재소(현재의 파출소) 소장이었다.

15세에 불과한 소년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고종황제 독살음모사건’, ‘3.1 만세운동’과 ‘보천보 전투’를 겁없이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다니. 두 평이 안 되는 공간에서 소년은 15일 동안 꼼짝없이 구류를 살아야 했다. 

유치장 생활을 하면서 강창덕은 민족의식이 더 커졌다. 아버지 강문찬은 구한말에 탁지부 주사로 잠시 근무하다가 전라도 정읍으로 낙향해 보천교에 입교했다. 강문찬은 자신의 토지를 팔아 보천교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했다.

이런 아버지에게 평소 들은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말했는데, 일제 경찰에게 ‘불령선인’으로 찍히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시발로 평생동안 그는 감옥을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했다. 2차 투옥은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초였다. 경산군 하양주재소 순사부장이 해군지원병을 가라고 하자, 거부하고 도피했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됐다.

해방 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일본 경찰에서 미군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1947년 11월 하순 강창덕은 대구역전 공회당에서 ‘분단반대·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주제로 연설했다가 ‘포고령 위반’으로 붙잡혔다.

이날 자리는 세계일보와 중앙일보가 공동주최한 ‘남녀학생 웅변대회’였는데, 강창덕은 대구상업학교 3학년생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퇴학 조치와 더불어 벌금 5천원을 내고 석방되었다. 경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조봉암

▲  제3대 조봉암 대통령 후보 벽보와 이범석 부통령 후보의 벽보.
ⓒ 국가기록원

“최종 개표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개표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선거관리위원장은 침을 삼키며 “조봉암 후보 3만4212표로 전체 유효 득표율 중 74.6%를 얻었습니다.” “와!”하는 소리와 함께 투표소에 있던 이들은 여야 가릴 것 없이 깜짝 놀랐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결과, 경북 경산에서 진보당 조봉암 후보가 이승만 후보를 압도적으로 이긴 것이다.

조봉암의 전국 총 득표수는 216만3808표로 30.0% 득표율에 그쳤는데, 경북 경산군에서는 3만4212표로 74%를 얻었으니 기겁할 만했다.

경북 경산군이 1956년 대선에서 ‘진보의 아이콘’이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경산은 6.25 당시 북한군 비점령 지역으로 이념 갈등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또 진보적 지식인 피난민들이 전쟁 후에도 경산에 살면서 진보적 여론을 주도했다. 여기에다 당시 대선에서 조봉암 경북 경산군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고군분투한 강창덕의 공도 컸다.

대구상고에서 퇴학당한 강창덕은 우여곡절 끝에 건국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한민당 소속 국회의원 서상일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해 일했다. 이후 1956년 진보당 창당에 합류한 서상일과 행보를 같이 한 강창덕은 ‘조봉암 전국 최다득표 선거구’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하지만 조봉암은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이듬해인 1959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승만의 반공주의 체제 하에서 강창덕은 더 이상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다. 1956년 9월 <영남일보> 공채시험에 합격한 그는 정치부 기자 생활을 잠시 하다가, 당시 ‘한강 이남의 최고 비판지’라 불린 <대구매일신문>에 입사했다.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어

1960년 4.19혁명은 강창덕의 가슴을 들끓게 했다. 교원노조·농민·학생운동이 활발해졌고, 한국전쟁 피학살자 유족회가 결성되었다. 강창덕은 유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코발트광산 사건 실태조사를 진행했고, 경산유족회를 탄생시킨 일등공신이었다. 

유족회가 만들어진 이후에 그는 사회대중당 활동에 주력했다. 1960년 7월 29일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창덕은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34세의 젊은 나이에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지만 중앙당은 3.15 부정선거와 관련된 이를 공천했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중앙당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국회의원 선거 후 사회대중당은 분열됐고, 그는 ‘사회당’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는 민주당 정권에서 다시 한 번 고초를 겪어야 했다. 장면 정권은 2대 악법, 즉 데모규제법과 반공임시특례법을 제정하려 했다. 데모로 만들어진 정권이 데모를 막겠다는 것이다. 1961년 4월 2일 대구에서 열린 ‘2대 악법 반대투쟁’에 참여한 강창덕은 ‘공무집행방해죄’로 입건됐지만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한 달 후인 1961년 5월 10일 사회당 경북도당 주최 ‘남북학생회담 촉진 대구시민 궐기대회’가 만경관 앞에서 열렸다. 그날 그가 외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사자후는 ‘반국가행위’로 규정되었다. 5.16 쿠데타 직후 강창덕은 생애 여섯 번째로 투옥되었다. 반국가행위로 12년 구형에 7년 징역형 선고를 받은 것이다.

이후에도 강창덕은 1968년 ‘범야권 단일후보운동’을 추진해 윤보선 후보 선거운동을 했고, 1971년에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 경북지부 총무부장을 맡았다.

재산압류 당한 인혁당재건위 관계자들

1974년에 그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는 후일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된 이재문과 함께 지하신문 <참소리>를 만들다가 구속됐다. 이번에는 무기징역이라는 끔찍한 형을 선고받았다.

구속된 지 10년 만인 1984년 성탄절에 강창덕은 잔형 면제 사면을 받았다.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고,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청구한 재심에서 사법부는 정의의 편에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대법원에서 인혁당 재건위 피해자 및 유족들에게 너무 많은(?) 배상금을 지불했다며 받은 돈의 상당 부분을 토해 내라고 한 것이다.

강창덕을 포함한 인혁당 관계자 상당수는 대법원의 재산압류 결정에 따라 파산위기에 빠졌다. 일부는 신용불량자가 되어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강창덕은 방 보증금 300만 원이 가압류됐으며 시가 50만원 이상의 부동산에는 빨간색 가압류 딱지가 붙었다. 구십 평생을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그에게 대한민국은 방 보증금을 압류하고 TV, 냉장고, 세탁기에 빨간 딱지를 붙였다. 94세 강창덕이 “내가 이럴려고 민주화 운동했나”라는 자괴감이 들지 않을까 나는 두렵다.

[사진=izzetugutmen/gettyimagesbank]
[사진=izzetugutmen/gettyimagesbank]

주말의 생활패턴은 평일과 달라진다. 아침 기상시간은 늦어지고 식사량, 식사시간, 활동량 등에도 많은 차이가 생긴다.

약간의 게으름과 느긋함은 필요하지만 건강을 위해 최소한 지켜야할 부분들이 있다. ‘프리벤션플러스웰니스닷컴’ 등의 자료를 토대로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되는 주말 행동 요령에 대해 알아본다.

◇움직여라

주말의 비활동적인 시간을 20분만 줄여도 건강 개선에 도움이 된다. 20분이면 지키기 까다로운 조건도 아니다. 격렬한 운동이 아니어도 좋다.

거실을 왕복하며 음악을 듣거나 TV를 보면서 스트레칭을 하는 수준이면 된다. 이처럼 비활동적인 시간을 줄이면 체지방 감량과 심장질환 위험률 감소에 도움이 된다.

그런데 평일에도 활동량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면 주말의 조건 역시 달라진다. 평소 바빠서 운동할 여력이 없는 사람은 주말 운동으로 대신해야 한다.

연구에 따르면, 주말 운동만 열심히 해도 평일에 따로 시간을 내어 운동하지 않아도 된다. 가령 평일 5일간 매일 15분씩 고강도운동을 하는 대신 주말에 75분간 고강도 운동을 하는 방식이다.

◇약간 많이 먹어도 된다

먹는 건 어떨까. 주말이면 대체로 먹는 양이 늘어난다. 하지만 주말 간식과 야식을 전부 끊으면 역효과로 더욱 폭식하는 상황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어느 정도 간식은 허용해도 좋다.

몸 관리는 장기적인 차원에서 꾸준히 해야 하는 부분이므로 오늘 한 끼 고칼로리 음식을 먹었단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기보단 한 주간 전반적으로 건강한 식사패턴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라

평일동안 부족했던 잠을 몰아 자는 것도 주말의 흔한 생활패턴 중 하나다. 주말 낮잠도 요령이 필요하다. 한꺼번에 밀린 잠을 보충하면 월요일에 더욱 피곤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 반면, 주말 잠이 평일의 부족한 잠을 벌충해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상반된 연구 결과들을 종합해보면 결국 잠자는데도 요령이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특히 밤잠을 들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낮잠을 자고도 밤에 충분히 숙면을 취할 수 있다면 적당한 낮잠을 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밤 시간 눈이 말똥말똥해진다면 낮잠 시간을 줄여야 한다.

주말 잠은 평일보다 1~2시간 정도 더 자는 수준이면 된다. 평일의 잠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면 적정 수면시간인 8시간을 채운다는 마음으로 주말에 잠을 자면 된다.

잠이 부족해지면 뇌의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육체 반응까지 떨어진다. 따라서 평일의 피로를 보충해주는 수준의 추가적인 수면은 필요하다.

권순일 기자 (kstt77@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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